AI 시대, 일의 낭만은 어디에 남는가
직장인이 일을 지속하게 되는 동력에는 크게 몇 가지가 있는 것 같다.
- 사업 성과: 내가 한 일이 실제 사업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때 오는 동력
- 개인 보상: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확실하게 주어질 때 오는 동력
- 성장 요인: 일을 하면서 내가 계속 배우고 있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오는 동력
- 몰입 요인: 일 자체가 너무 재미있고 즐거워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때 오는 동력
더 있겠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이다. 요즘 이 중 네번째인 몰입 요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커리어 초반에 개발자로 일하던 시절에는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이 들으면 조금 웃길 수도 있지만) “코딩”이라는 행위 자체에 낭만이 있었다. 큰 규모의 앱은 단순 버튼 색 하나를 바꾸거나 카드의 색감을 조정하는 일조차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작은 색상 변경 하나가 해당 UI 컴포넌트를 공유하는 다른 페이지에 어떤 연쇄 효과를 가져올지, 화면 크기에 따른 호환성은 어떻게 챙겨야 할지, 어느 컴포넌트 레이어를 수정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적절할지, 그래서 테스트 케이스는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등을 하나하나 고민해야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변경이지만, 그 안에는 큰 시스템을 이해하고, 리스크를 미리 생각해보고, 더 나은 구조를 찾는 과정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변경이 사용자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또는 큰 아키텍처링은 어떻게 해야 할지와 같은 질문들은 여전히 꼼꼼히 짚고 넘어갈 것이다. 다만 예전처럼 “코딩” 자체를 그렇게 깊게 고민하는 시간은 줄어든 것 같다.
과거에는 이렇게 코딩만 놓고 보더라도, 사소한 변경 하나에도 깊이 고민하고, 시스템을 이해하고, 동료들과 토론하며 더 나은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있었다. 느리고 번거로웠지만, 그 과정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몰입과 성장이 있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슬랙 글이나 한 장짜리 기획 문서 조차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쓰던 때가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쓰려고 하는 편이지만, 요즘 많은 IT 업계 종사자들을 보면 AI로 글을 자동 작성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을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다.
글을 읽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과 배경지식을 고려하고, 어떤 흐름으로 전달해야 가장 명료하고 효율적일지 고민하고, 그에 맞춰 글의 구조를 잡아가는 과정에는 분명한 재미가 있었다. 읽는 사람이 어디에서 막힐지, 어떤 표현이 더 정확할지, 어떤 순서와 구조로 말해야 설득력이 생길지를 생각하며 정성 들여 쓰는 낭만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클로드에게 요청하면 20초 만에 그럴듯한 글이 나온다. 편리하긴 하지만, 그만큼 과거의 글에서 느껴지던 사려 깊음이나 고민의 흔적은 줄어드는 것 같다. 이렇게 글쓰기 자체에서도 몰입의 요소가 많이 떨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업무 결과물 자체를 만들어내는 일에서 낭만과 몰입을 찾던 것은 점점 과거의 일이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에서 남는 몰입은 어디에서 올까. 전혀 다른 직군이나 산업으로 옮겨가는 급격한 전환을 제외한다면,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개인의 업무 범위가 더 넓어지는 것이다. 절대적인 일의 커버리지가 늘어날 수도 있고, 커버리지는 같더라도 더 깊은 영역까지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제는 회사 구성원 모두가 단순히 “이 일을 어떻게 되게 만들지?”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애초에 왜 해야 하지?”, “다른 대안은 없을까?”, “이것을 시장에는 어떻게 들고 가야 할까?”까지 함께 다각도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되면 조직 차원에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직원 수는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조직이 절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수는 늘어날 수 있다. 개인 입장에서도 단순히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것을 넘어, 문제의 정의와 방향, 실행과 시장 진입까지 더 넓은 범위에 관여하게 된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몰입과 성장의 여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아직 AI가 쉽게 끼어들 수 없는 human-touch 영역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동료들과의 실시간 대화, 준실시간으로 오가는 업무 채널의 상호작용, 고객과의 interaction, 내외부 pitch 처럼 사람 손을 타고 개개인의 특성이 들어가야 완성되는 일들이다. 맥락을 읽고, 분위기를 살피고, 상대의 반응에 맞춰 생각을 조정하고, 그 자리에서 함께 답을 찾아가는 일에는 여전히 인간적인 몰입이 남아 있지 않을까.